[AI칼럼] AI안보와 디지털 주권 - 식량주권의 교훈으로 보는 디지털 자립의 마지노선
우리는 오랫동안 식량안보를 국가 생존의 문제로 다뤄왔다. 국내산 쌀이 수입산보다 비싸도, 농지를 보전하고 농업 기술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 사회적 합의가 있다. 값싼 수입 농산물에 의존하다 식량 위기가 닥쳤을 때 협상력을 잃은 국가들의 사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이제 같은 질문을 AI 부문에 던져야 할 때가 왔다. AI 안보는 식량안보와 얼마나 다른가.
편리함 뒤에 숨은 종속의 구조
트럼프 행정부가 앤스로픽·오픈AI 등 미국 빅테크의 AI 기술에 수출 통제와 접근 제한 조치를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막연하게 여겨졌던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다. 미국 우선주의가 기술 영역에서도 언제든 발동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중국도 AI의 해외 유출을 막는다고 한다.
지금 많은 국가들이 처한 상황은 1970~80년대 값싼 수입 농산물에 의존하며 농업 기반을 해체했던 나라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빅테크 API는 저렴하고 성능도 뛰어나다. 굳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면서 직접 소버린 AI를 개발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편리함 뒤에는 종속의 구조가 조용히 자리 잡는다. 만약 접근이 차단되는 순간이 오면, 공공·금융·국방 시스템이 동시에 흔들리는 상황이 온다.
식량 없이는 사람이 굶는다. AI에 종속되면 국가가 멈추고, 국가가 들여다보인다.
한번 포기하면 되돌아오기 어렵다
소버린 AI 개발을 포기하는 순간, 국가는 세 가지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는다.
첫째, AI 문해력의 상실이다. 자체 모델을 운영한 경험이 없으면 기술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어떤 리스크를 내포하는지 판단하는 능력 자체를 잃게 된다. 기술을 사용하되 이해하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된다.
둘째, 인재의 공동화(cavitation)이다. 뛰어난 AI 연구자와 엔지니어는 생태계가 살아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국내에 연구할 토양이 없으면 인재는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고, 인재가 없으면 생태계는 더 빠르게 붕괴한다. 이 악순환은 단순히 예산을 투입한다고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셋째, 디지털 주권의 종속이다. 공공기관의 행정 데이터, 국방 관련 기밀, 금융시스템의 핵심 정보가 외국 플랫폼 위에서 처리된다. 어떤 데이터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 수 없는 블랙박스 안으로 국가의 민감한 정보가 흘러들어 갈 수 있다.
경제학은 이를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으로 설명한다. 초기의 선택이 미래의 선택지를 구조적으로 제약한다는 원리이다. AI 개발을 포기하는 경로를 한 번 택하면, 생태계 이탈과 인재 유출이 서로를 가속화하는 음(-)의 피드백 루프에 빠져 복귀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한번 버린 농지와 농업 인력을 되살리기 어렵듯, 한번 무너진 AI 생태계는 되돌리기 어렵게 된다.
자급은 고립이 아니라 협상력이다
소버린 AI를 강조하는 것이 빅테크를 배격하자는 주장으로 오해받아서는 안 된다. 식량 선진국들이 자급률을 높이면서도 국제 무역을 병행하듯, AI도 자체 역량을 갖추면서 글로벌 협력을 이어가는 것이 현실적인 전략이다.
핵심은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협상의 조건을 바꾼다는 점이다. 외교·통상 갈등 국면이나 기술 접근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자체 운용 가능한 AI를 보유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의 협상력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평시의 비효율처럼 보이는 투자가, 유사시에는 국가가 가진 엄청난 레버리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AI안보는 식량안보 보다 더 까다로운 측면이 있다. 농산물은 비축이 가능하지만 AI는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연결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AI는 행정·의료·금융·국방 전 영역에 동시에 내재화되는 인프라이다. 종속의 파급력이 식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다.
최고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통제할 수 있는 AI
소버린 AI의 가치는 벤치마크 점수로 측정되지 않는다. 글로벌 최고 수준의 AI를 만들자고 하는 건 아니다. 외부 압력 하에서도 우리 국가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AI를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일상화된 지정학적 환경에서, 소버린 AI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지를 잃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 역할을 한다. 식량주권이 국가 생존의 마지노선이듯, AI 주권은 디지털 시대 국가 자율성의 마지노선이다.
AI기술이 현재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투자를 아끼면, 훗날 훨씬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Comments
Post a Comment